1. 서론: 마지막 공개 사역과 거룩한 기소장 (마 23:1–39)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겸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성전을 청결케 하신 주님은 21장과 22장에 걸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의 악의적인 질문과 시험에 완벽한 진리로 응답하시며 그들의 입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23장은 고난 주간 화요일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뿌리 깊은 교만과 외식을 엄히 꾸짖으시고, 참된 제자도의 길과 예루살렘의 비극적 멸망을 선포하신 가장 엄숙하고 준엄한 경고의 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무리와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행하신 '마지막 공개 사역의 절정'이 바로 23장입니다. 이 장은 이어지는 24장과 25장의 종말론적 최후 심판 설교를 선포하시기 전, 종교적 위선과 부패를 낱낱이 고발하시는 '주님의 공식적인 기소장(Indictment)' 역할을 감당합니다. 오늘 주님은 과연 어떤 죄목으로 종교인들을 기소하고 계십니까?
2. 종교지도자들의 위선 책망: 모세의 자리와 역설적 제자도 (1–12절)
1절에서 12절까지의 단락에서 주님은 종교인들의 외식하는 삶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던지십니다. 이 단락을 여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2절의 '모세의 자리'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마 23:2–3)
'모세의 자리(카테드라, καθέδρα)'는 문자적으로 랍비들이 회당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칠 때 앉던 실제 석좌를 의미하며, 은유적으로는 모세로부터 계승된 '율법의 교사 및 해석자로서의 공식적인 권위'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거룩한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르침이라는 지적 우월성에만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요구하시는 '율법의 본질과 사랑의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가르치는 율법의 말씀 자체는 지키되,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는 결코 본받지 말라고 엄히 명하십니다. 그들의 행위가 어떠했습니까? 남에게는 무거운 짐을 묶어 어깨에 지우되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마 23:5)
그들은 율법의 말씀을 담아 이마나 팔에 매는 작은 가죽 상자인 경문(테필린, Phylacteries)을 남들보다 유난히 넓고 크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기 위해 겉옷 단에 달던 옷술(찌찟, Tassels)을 화려하고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나는 이토록 철저히 율법을 지키는 거룩한 사람이다!"라는 자기 과시와 영적 우월성을 종교적 장치로 포장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탐했고,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들에게 '랍비, 아버지, 지도자'라 칭함 받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너희 중의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8, 11–12)
랍비와 아버지와 지도자는 존중받아야 할 귀한 직분이지만, 모든 인간 위에 가장 높은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주님은 세상의 서열 질서를 뒤엎는 거룩한 역설을 말씀하십니다. 높아지고 대접받고 싶다면 스스로 낮아져 섬기는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진정한 높임은 인간의 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비롯됩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무릎으로 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 가장 존귀하게 세우실 것입니다.
3. 종교적 위선을 향한 일곱 가지 화: 산상수훈과 대조되는 준엄한 심판 (13–36절)
13절부터 36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쏟아부으신 '일곱 가지 화(Woe, οὐαί)'가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 나타난 '팔복(Makarios)'과 완벽한 대조를 이룹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천국의 복을 주시고, 어떤 자에게 영원한 화가 임하는지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 복과 화의 말씀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언약의 백성,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영적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두려운 말씀입니다. 이 일곱 가지 화를 흐름별로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제1·2화: 천국 문을 닫고 다른 영혼의 구원을 가로막는 죄 (13, 15절)
첫 번째와 두 번째 화는 위선자들이 타인에게 미치는 치명적인 악영향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된 교리와 형식주의로 천국 문을 굳게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 하는 성도들의 발걸음마저 가로막았습니다.
더 나아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막상 얻고 나면 자기들보다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명자들이 도리어 사람들의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영적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참담한 영적 아이러니입니까!
제3·4화: 그릇된 맹세와 본질의 상실 — 정의, 긍휼, 믿음 (16–24절)
세 번째와 네 번째 화는 잘못된 율법 해석과 우선순위의 왜곡을 지적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고 가르쳤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성전보다 눈앞의 황금을 더 귀하게 여기는 '눈먼 인도자'들의 물질주의적 탐욕을 드러낸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마 23:23–24)
그들은 텃밭의 사소한 식물인 박하, 회향, 근채의 작은 잎사귀까지 정밀하게 계산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참된 핵심이자 하나님의 심장인 '정의(의, Mishpat)', '긍휼(인, Hesed)', '믿음(신, Emunah)'은 가차 없이 내팽개쳤습니다. 부정한 벌레인 하루살이는 음료에서 정성껏 걸러내면서, 율법적으로 부정한 거대한 낙타는 꿀꺽 삼켜버리는 기괴한 위선에 빠져 있었습니다.
제5·6화: 겉과 속의 극명한 대조 — 탐욕의 잔과 회칠한 무덤 (25–28절)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화는 외형적 종교성과 내면적 부패의 극적인 모순을 질타합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번쩍거리게 닦았으나 그 안에는 이웃을 착취한 탐욕과 방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님은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명령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7–28)
당시 유대인들은 유월절 절기 때 순례자들이 무덤을 무심코 건드려 부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무덤 바깥에 하얗게 석회(회)를 칠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눈부시게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석회 벽 바로 안쪽에는 썩어 문드러진 시체의 해골과 부패한 악취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겉모양만 거룩하게 포장하고 속은 죄악과 불법으로 썩어가는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향한 주님의 가장 통렬한 비판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불꽃 같은 눈동자로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과 은밀한 동기를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7화: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죄를 채우는 패역 (29–36절)
일곱 번째 화는 위선의 절정입니다. 그들은 순교한 옛 선지자들의 무덤을 화려하게 수축하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우리가 조상들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자화자찬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조상들보다 더 완악하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의 죄의 분량을 고스란히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추상같은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마 23:33, 36)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잠들지 않습니다. 지금은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고 보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회개하지 않는 위선과 완악함은 마침내 그 세대 위에 온전한 심판으로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세상 권세나 사람의 평판이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공의로 심판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4. 예루살렘을 향한 눈물의 탄식과 황폐화 예언 (37–39절)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향해 불같은 분노로 기소장을 낭독하신 예수님은, 37절에 이르러 멸망을 향해 치닫는 도성을 바라보시며 애끊는 눈물의 탄식을 터뜨리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 23:37)
주님의 마음은 징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맹수가 덮쳐올 때 자기 목숨을 던져 새끼를 날개 아래 품는 어미 암탉처럼, 주님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품으시고 살리시려 수없이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끝끝내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 23:38–39)
주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 로마의 티투스(디도) 장군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함락되었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철저하게 불타 황폐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메시아를 거절한 종교 도시의 최후는 처절한 멸망이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했던 이유는 종교적 껍데기와 기득권에 눈멀었기 때문입니다. 겸손히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웅장한 예배당과 화려한 종교 의식도 결국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될 뿐입니다.
5. 결론 및 결단: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삶
마태복음 23장을 묵상할 때, 우리는 이 말씀이 2000년 전 바리새인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님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무엇보다 단에 서는 목회자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주시는 지극히 두렵고 떨리는 경고입니다.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종교인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습니까? 남을 가르치는 데는 익숙하면서 정작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율법 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 경문 띠를 넓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감찰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긍휼 앞에 엎드려 "주여, 위선적인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부르짖는 상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연약한 담임목사와 교회의 모든 리더십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람의 야망이나 인간적인 지혜로 교회를 이끌지 않고, 오직 무릎으로 엎드려 성도들을 바른 생명의 길, 의의 길로 인도하는 참된 섬김의 종이 되도록 중보해 주십시오.
오늘 하루, 내 안의 모든 거짓된 가면을 벗어버리고 불꽃 같은 주님의 시선 앞에서 가장 겸손히 낮아져,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온 마음으로 섬기는 복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