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보산 위에 선 노종 모세의 기도
시편 90편의 표제어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입니다. 모세가 80세 이후 광야 40년의 숱한 고난과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통과한 뒤 지은 장엄한 기도시입니다.
나일강의 갈대상자에서 건짐 받아 이집트의 왕자로 살았던 40년, 살인과 도망자로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쳤던 40년, 그리고 80세에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 출애굽과 홍해, 시내산 율법, 반석의 생수를 경험했던 마지막 40년이었습니다.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 반역과 대적자들의 공격 앞에서도 모세가 일평생 붙잡았던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의 엎드림과 기도’였습니다. 이제 그는 느보산에 올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다음 세대에게 고별 설교(신명기 32–33장)를 전하고 이 시편을 남깁니다.
"인생의 허무와 결핍을 깊이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향해 참된 기도의 손을 들 수 있습니다."
시편 90편의 키아즘(Chiasm) 구조: 허무에서 소망으로
시편 90편은 정교한 키아즘(대칭)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절부터 11절까지는 티끌로 돌아가는 인간의 유한함과 덧없는 인생의 허무, 주님의 진노 아래 탄식하는 인간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허무주의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12절을 기점으로 17절까지 반전이 일어납니다. 유한한 인생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진정 무엇을 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확한 길을 제시합니다.
모세는 이 대칭의 전환점에서 하나님을 향해 네 가지 결정적인 간구를 쏟아놓습니다.
제1간구.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소서 (12절)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2)
모세가 가장 먼저 구한 것은 바로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이 지혜는 세상의 약삭빠른 처세술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근원적인 지혜입니다.
참된 지혜의 출발점은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며 명예를 쌓는 데 혈안이 되지만, 그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솔로몬 왕 역시 전도서에서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전 2:11)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남긴 교훈이 무엇입니까?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전 12:1)였습니다.
"내 날의 끝을 알고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준비하는 사람만이, 유한한 삶 속에서 영원의 가치를 붙잡습니다."
제2간구. 주의 얼굴을 돌이키사 긍휼을 베푸소서 (13절)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시 90:13)
모세의 두 번째 간구는 ‘관계의 회복과 긍휼’입니다. 본문에서 '돌아오소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슈브(שׁוּב)입니다. 본래 인간이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 돌이키는 '회개'를 뜻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감히 하나님을 향해 간구합니다. "주여, 우리를 향한 진노의 마음을 거두시고 주의 얼굴을 다시 우리에게로 돌이켜 주옵소서!" 그리고 나함(נָחַם)의 긍휼을 구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교만하며 쉽게 넘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 3:34)라는 말씀처럼, 철저한 겸손으로 주의 긍휼을 호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없이는 단 하루도 설 수 없는 연약함을 인정할 때, 회복의 은혜가 임합니다."
제3간구.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14절)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시 90:14)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소형차를 타면 중형차가 보이고, 중형차를 타면 대형차와 고급차가 눈에 들어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인간의 공허를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모세가 구한 만족은 히브리어로 샤바(שָׂבַע)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차고 넘치는 풍성함(질적·양적 완결)"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펴사 베푸시는 결핍 없는 완전한 만족입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은 일시적인 ‘즐거움(Pleasure)’에 불과하지만, 아침마다 부어주시는 주의 인자하심(헤세드)을 맛볼 때 영혼은 흔들리지 않는 ‘참된 기쁨(Joy)’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6).
"환경과 비교에서 벗어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법(샤바)을 배울 때, 일생 동안 기쁨이 마르지 않습니다."
제4간구. 고난의 날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5절)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시 90:15)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주님의 징계와 진노 아래 수고와 슬픔, 수많은 재앙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탄식으로 기도를 끝맺지 않습니다.
"주님, 우리가 괴로움을 당했던 그 날수만큼, 화를 당했던 그 연수만큼 이제는 우리를 기쁘게 하옵소서!" 고난의 세월을 뛰어넘어 가나안에서 하나님이 주실 찬란한 기쁨의 역전을 구한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방황은 하나님을 만날 때 끝이 납니다. 오랜 신앙생활 속에서도 이 하늘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모세의 기도로 나아가십시오.
"흘렸던 눈물의 날수만큼, 견뎌낸 광야의 연수만큼 주님은 넘치는 하늘의 기쁨으로 보답하십니다."
19번의 ‘우리’와 다음 세대를 향한 사명 (16–17절)
시편 90편을 깊이 묵상하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모세는 기도의 주어로 '나'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명사를 무려 19번이나 반복합니다.
- 주어 형태 ("우리는", "우리가"): 총 3회
- 소유격 형태 ("우리의", "우리"): 총 9회
- 목적격·여격 형태 ("우리를", "우리에게"): 총 7회
모세는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까지도 자기 안위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백성 전체를 가슴에 품고 중보했습니다. 이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를 위해 피 흘리시며 중보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과 맞닿아 있습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 90:16–17)
어른들의 눈물 어린 신앙 고백과 기도는 다음 세대를 살리는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영적 유산입니다. 평생 주 안에서 수고한 모든 땀방울이 헛되지 않고 후대에 아름답게 결실하도록 기도하는 것이 노년의 최고 사명입니다.
"내 호흡이 다하는 그날까지가 바로 사명입니다! 다음 세대가 다시 살아나고 부흥이 임하도록 기도의 무릎을 견고히 세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