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을 마무리하는 마태복음 7장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지혜의 결정체이자, '행동하는 신앙생활'의 위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본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신앙의 내면적 심성을 다루시고, 6장에서 은밀함의 경건(구제·기도·금식)과 보물·염려의 문제를 조명하셨다면, 7장에 이르러서는 타인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인내의 기도, 그리고 말씀을 실제 삶으로 실천하여 영원한 반석 위에 신앙의 집을 짓는 구체적인 행함에 대하여 강하게 선포하십니다.
1. 비판하지 말라: 내면의 방어기제와 아담의 DNA (1–5절)
주님께서는 7장의 첫머리에서 인간관계의 가장 중요한 대원칙으로 문을 열어주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7:1–2)
현대 심리학에서는 타인을 맹렬히 비판하고 비난하는 행위의 내면을 분석할 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겉으로는 타인의 잘못과 흠을 바로잡으려는 정의로운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자아를 보호하고 내면의 불안과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조상 아담의 DNA에서 비롯된 본성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 아담은 하와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극찬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죄가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이 바로 '책임 회피와 비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며 핑계를 대고 상대방을 탓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부패한 본성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처리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내 정욕과 이기심, 비판하고 비난하는 습관은 내 의지나 힘으로는 제어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나아갈 때에만 비로소 주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비판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와 가정,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상대방에게 심각한 피해를 줄 때는 건전한 조언과 바로잡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에서 상을 엎으시고, 진리에 대해 변론하셨으며, 헤롯이 자신을 죽이려 할 때 헤롯을 향해 "여우"라 칭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다만, 공동체와 상대방을 위해 건전한 비판이나 조언을 할 때는 반드시 두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첫째,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진정 사랑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조언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여 비꼬는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다 압니다.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비판은 상처와 분열만을 낳을 뿐입니다.
둘째, 말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타인을 향해 입을 열기 전, 그를 위해 하나님께 엎드리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볼 때 상대방의 행동이나 생각이 틀려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나의 오해이거나 나의 짧은 견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시고 지혜를 주실 때 비로소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조언할 수 있는 적절한 시각과 싸인을 주십니다.
2. 분별하라: 거룩함과 진주를 보존하는 영적 지혜 (6절)
이어서 6절은 앞선 1–5절과 대단히 대조적인 엄중한 선언이 등장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마태복음 7:6)
1–5절의 대상이 형제와 이웃, 교인들이라면, 6절의 대상은 복음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배척하며 조롱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와 복음을 배척하는 무리에게 무조건적인 용납만을 적용할 것이 아니라, 철저한 '영적 분별력(Spiritual Discernment)'이 필요함을 경고하십니다.
율법적으로 개와 돼지는 대표적인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 당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켜 개처럼 부정하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소중하고 거룩한 진리가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훗날 제자들을 전도 현장으로 보내실 때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 10:23). 무모하게 진주를 짓밟는 자들에게 억지로 거룩한 것을 던지다 조롱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복음의 가치를 존중받게 하는 지혜가 성도에게 필수적입니다.
3. 기도하라: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7–11절)
타인을 비판하지 않고 영적으로 분별하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력은 바로 기도(Prayer)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7:7–8)
주님께서는 7장에서의 기도의 자세를 점진적인 3단계 동작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① 구하라 (αἰτέω, Aiteo): 하나님 앞에 나의 필요와 간구를 겸손히 입술로 아뢰는 기도의 시작입니다.
② 찾으라 (ζητέω, Zeteo): 기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도의 응답을 위해 직접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 행동하는 적극적인 기도의 태도입니다.
③ 문을 두드리라 (κρούω, Krouo): 응답의 문이 열릴 때까지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며 기다리는 인내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 끈질긴 기도의 능력을 잘 보여주는 현대 교회사 사역자가 있습니다. 바로 빈야드 운동(Vineyard Movement)을 일으키고 치유 사역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했던 존 윔버(John Wimber)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존 윔버 목사님이 처음 치유 사역에 소명을 받고 사역을 시작했을 때, 무려 10개월 동안 약 1,000명이 넘는 환자들에게 손을 얹고 간절히 치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깜짝 놀랍게도 10개월 동안 단 한 명의 병자도 낫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실망하고 "나에게는 치유의 은사가 없나 보다"라며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끈질기게 환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0개월이 지난 후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치유의 역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수많은 병자가 고침받는 치유 사역자로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자신의 사역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 어떤 사역자보다 병 고침을 위해 한 명 더 끈질기게 기도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성령과 최선의 응답을 주십니다. 악한 부모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4. 황금률: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12절)
12절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윤리적 선언이라 불리는 '황금률(Golden Rule)'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세상의 윤리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소극적 금지 명령에 머뭅니다. 그러나 주님의 황금률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입니다. 내가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타인을 존중하고, 내가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타인을 사랑하며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율법과 선지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정신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방식입니다.
5. 두 가지 선택과 결단: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집 (13–29절)
마태복음 7장의 하반부(13–27절)는 산상수훈 전체를 마감하면서, 모든 청중에게 '두 가지 길과 두 가지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1] 두 가지 길 (13–14절): 좁은 문과 넓은 문. 넓은 문과 큰 길은 찾는 사람이 많고 편하지만 결국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반면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은 찾으이가 적고 외로우며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주님이 몸소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2] 두 가지 나무 (15–20절):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 성도의 십자가 삶은 결국 말과 행동, 일상의 습관이라는 삶의 열매를 통해 영적 정체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열매로 그들을 평가하십니다.
[3] 두 무리 (21–23절): "주여 주여 하는 자"와 "하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들의 심장을 서늘하게 만드는 경고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선지자 노릇을 했을지라도,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이 불법을 행했다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는 절망적인 선언을 듣게 됩니다.
그렇기에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은 선포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종교적 입술의 고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거룩한 교제입니다.
[4] 두 집 (24–27절):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태복음 7:26–27)
산상수훈의 클라이맥스이자 핵심은 바로 '듣고 행하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 19절에서도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지 아니하고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라"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바람이 불고 인생의 모진 풍파와 주님의 심판이 다가올 때, 말과 이론에만 머물렀던 모래 위의 집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십자가의 순종과 행함으로 삶을 지어 올린 성도의 집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반석(πέτρα, Petra)' 위에 세워져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타인을 비판하기보다 기도로 품고, 영적 분별력을 지니며, 끈질긴 기도로 승리하고, 들은 바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